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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의거 기념일 의미 알고계시나요?

우리나라에는 많은 의미있는 날들이 있지만, 공휴일이 아니면 기억을 못하고 지나가는 날 또한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3.15의거 기념일 인데요. 오늘은 그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월 15일 1차 의거 이후에, 4월 11일, 그 동안 행방불명 되었던 김주열 군의 머리에 취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의 시체로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르자, 격분한 시민들이 다시 2차 의거를 일으키며 피흘리며 싸운 일 입니다. 이 항쟁에서 12명이 사망했고, 경찰이 쏜 총에 맞거나 체포되고 구금된 250명이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모아지고, 구속된 마산 학생을 석방하라는 구호와 함께 4.19 로 이어지게되면서,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며 민권이 승리하게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3.15 의거 의 발생배경은?

1960년 당시의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1인당 80$ 정도였습니다. 국민소득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는 어려웠으며, 정치 또한 부정부패가 난무한 세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농가에서 보리고개를 넘기지 못해, 소나무 껍질이나 칡뿌리, 산나물 등으로 허기를 채워나가고 있었습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국회의장에 피선된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을 지낸 후에 1952년 자유당을 창당하면서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54년에는 대통령의 3선 금지조항을 고쳐, 실질적인 종신 대통령의 길을 마련하기 위한 개헌안을 내놓았지만, 국회에서 부결이 되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 203명 중, 136명 이상이 필요하지만 투표결과 1명이 부족하여, 부결이 되었는데요. 203명 중 2/3가 135.3333 이니 135명만 찬성하면 된다고 우겨 사사오입(반올림) 논리를 적용하여 부결을 번복하고 통과시켰습니다.



부정선거 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최인규의 지휘아래, 전국 경찰의 주요 간부는 모두 맹목적으로 충성할 수 있는 인물로 교체되었습니다. 집요한 분열 정치 공작 뿐만 아니라, 깡패등을 동원해 선거운동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일반 공무원은 물론이고, 교육 공무원들까지 부정선거 운동에 투입되었는데요. 자유당에 투표할 것을 설득하는 담임교사의 가정방문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3.15의거 의미

이 투쟁을 통해서 4.19혁명, 부마민주화운동, 6월항쟁, 5.18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키쳤습니다. 365일 중의 하루로 그냥 흘려버릴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의미를 보면 그래서는 안되는 날이 3.15의거 기념일 이겠습니다. 마산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김해를 비롯한 경남 지역에 거주하고 계시는 분들에게는 조금 더 다른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립 3.15 민주묘지 도 있으니, 아이들과 함께 찾아보시면서 역사를 이야기해주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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